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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그’는 왜 쇼팽의 야상곡을 쳤을까?
기사입력: 2020/11/19 [18:35]
윤구 기자/뉴스1 윤구 기자/뉴스1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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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점령지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수기 ‘피아니스트’
나치 장교에게 발각…피아노 야상곡 연주로 살아남은 실화
쓰레기통 속 곰팡이 핀 빵 먹으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폴란드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 논픽션 수기 ‘피아니스트’ 영화로도 성공


 기자는 사실과 진실을 추적하는 직업이다. 이런 기자직을 오래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습성이 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대화 중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소설을 끝까지 읽어낼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소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그럼 어떤 책을 읽나. 논픽션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1인칭 화법으로 시간순으로 쓰는 게 논픽션이다. 최근에 나온 밥 우드워드의 ‘격노’(Rage)같은 것이다. 다른 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독자들은 화자(話者)에 감정이입이 되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내가 읽은 논픽션 수기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피아니스트’다. 저자는 폴란드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Wladyslaw Szpilman 1911~2000). 이미 많은 독자가 ‘피아니스트’를 읽었다. 2002년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이런 부제가 달렸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의 수기’
이 수기를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2003년에 나온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 스필만은 애드리안 브로드가 맡았다. 뛰어난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면 원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피아니스트’는 원작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폴란드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 논픽션 수기 ‘피아니스트’ 영화로도 성공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국경에 인접한 폴란드의 항구도시 그단스크를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촉발되었다. 수기는 바르샤바를 포위한 독일군이 도시를 압박해 들어오는 순간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라디오 방송국에서의 마지막 날(9월 23일) 나는 쇼팽의 곡을 독주했다. 바르샤바에서 음악 생방송이 나간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연주하는 동안 방송국 가까운 곳에서 포탄이 계속 작렬했고, 바로 곁의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밖의 소음 때문에 내가 치는 피아노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포격이 그치지 않아 나는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린 뒤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53쪽)

 

▲ ‘피아니스트’ 표지 (뉴스1 제공)    

 

■독일 바르샤바 점령후 유태인들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이송

 

9월 27일 바르샤바는 독일군에 함락됐다. 며칠 뒤 2개 국어로 된 독일군 사령관의 포고문이 바르샤바에 나붙었다. 유대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고 그들의 재산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주겠다…’


나치는 11월부터 유대인들의 동네에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다. 이어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푸른 별을 박은 하얀색 완장을 차야 했다. 1940년 말 유대인 45만 명이 게토 안에 갇혔다. 게토의 면적은 3.4㎢. 인구밀도가 닭장 수준이다. 하수 시설과 의료 시설이 절대 부족해 전염병이 창궐하기 딱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인성 전염병인 발진티푸스가 게토에서 발생해 2만5000여 명이 쓰러졌다.


 1942년 7월까지 유대인 10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나갔다. 유대인들은 발진티푸스에서 격리한다는 명분으로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스필만은 유대인의 처지를 ‘위험에 처한 개미집 같았다’고 묘사한다.
‘아무 생각 없는 어떤 천치 같은 자가 징 박힌 구두 뒤축으로 개미집을 파괴하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탈출구를 찾아 사방으로 정신없이 달아날 것이다…’

 

■수기 저자 숨어지내다 독일 장교애개 발각돼 살아난 이야기 ‘감명’

 

 스필만의 가족들은 그렇게 독일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그는 빈집 지하실과 다락방을 전전하며 버려진 음식을 먹었다. 독일군들은 유대인을 색출하려 이 잡듯 뒤지고 다닌다. 그는 빵 한 덩어리로 열흘을 버티기도 했다. 벽감(壁龕)에 숨어 종일을 보낼 때도 있었다. 독일군이 건물에 들어오면 ‘이젠 죽었다’고 각오했지만 아홉 번 사는 고양이처럼 살아나길 반복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해 수면제를 통째로 삼키기도 했다. 불타는 건물 속에서 홀로 견뎠고 쥐똥으로 뒤덮인 곰팡이 핀 빵을 감지덕지 먹었다. 독일군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도둑고양이처럼 먹을거리를 찾아 폐허가 된 집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집에서 식료품 창고를 뒤지다 독일군 장교에게 들키고 만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댁 마음 내키는대로 해요.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직업이 뭐요?”
 “피아니스트요”
장교는 그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독일 장교가 피아노를 가리켰다.
 “연주해봐요”
그는 거의 3년간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 손톱을 깎지 못한 손가락으로 그는 연주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가 연주한 곡은? 쇼팽의 야상곡 C#단조였다.
독일장교는 사흘 뒤 신문지로 둘둘 만 빵과 잼을 가져다주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희망을 가지고 버텼지만 스필만은 사람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칠흑의 고독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 이 논픽션을 썼다. 1946년 바르샤바에서 ‘한 도시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양심이 살아 있는 나치 장교 빌름 호젠펠트

 

상상을 해본다. 그가 피아니스트가 아니었으면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또 그가 피아니스트였더라도 양심이 살아 있는 나치 장교 빌름 호젠펠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유대계 피아니스트가 인간의 피가 흐르는 나치 장교를 만난 것 자체가 기적이다. 자신이 피아니스트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그 절박한 순간에 그는 쇼팽의 야상곡 C#단조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바르샤바 라디오 방송국에 복직했다. 방송국에 나가 연주한 곡 역시 쇼팽의 야상곡 C#단조였다.

 

▲ 비숑이 1847년에 촬영한 프레데릭 쇼팽 (사진출처=위키피디아/뉴스1)   


■쇼팽, 파리에서 최고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명성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게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이었다. 한국인 최초다. 5년마다 콩쿠르가 열리는 곳은 바르샤바 콘서트홀. 3주간 쇼팽의 피아노곡 40곡을 연주하는 경연이다.
 1810년 바르샤바에서 생을 받은 프레데릭 쇼팽. 어려서부터 재능을 드러낸 그는 열네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려면 빈이나 파리로 가야 했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1830년, 스무살 때였다. 친구들은 고향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바르샤바의 흙을 작은 병에 담아 작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가 빈에 갔을 때 베토벤은 이미 같은 하늘 아래에 없었다. 그는 빈을 거쳐 꿈에 그리던 파리로 갔다. 하지만 파리에는 변방 출신의 무명의 작곡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면서 음악 인생이 피기 시작한다. 리스트는 쇼팽을 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로 소개했고, 쇼팽은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마음 놓고 작곡에 몰입한다. 수년 후 쇼팽은 파리에서 최고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가 된다. 독창적인 음악 세계에 대한 찬사가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졌다. ‘스타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 귀족 살롱들은 경쟁적으로 쇼팽을 초대했다. 여성들의 유혹이 봄꽃처럼 만발했다.

 

▲ 나다르가 1864년에 촬영한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 (사진출처=위키피디아/뉴스1)    


■쇼팽 야상곡, 당대의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와 만나 보내면서 쓴 작품

 

 쇼팽은 운명의 여인과 만난다. 당대의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1804~1876)다. 애가 딸린 연상의 이혼녀였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설가와 작곡가의 연애는 파리 최고의 화제였다. 지중해 마요르카섬에서 두 사람은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낸다. 상드와 사랑을 나누면서 쇼팽은 불멸의 피아노곡들을 써낸다. 두 사람은 성격에서 극단적이었다. 상드는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한 반면 쇼팽은 고독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파리에서 두 사람은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음악가 인생의 절정기에 폐결핵이 발병한다. 치료 약이 없던 폐결핵은 당시 암보다도 무서운 병이었다.1849년 그는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심장은 고향인 바르샤바 ‘성 십자가 교회’로 보내졌고, 육신은 파리 시내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친구들은 하관하면서 그가 평생을 간직해온 바르샤바의 흙을 관 위에 뿌렸다.

 

▲ 페르 라셰즈 공원묘지의 쇼팽 묘지 (뉴스1 제공)   


 ‘페르 라셰즈’의 쇼팽 묘지는 사계절이 봄이다. 에디트 피아프 묘지 못지않게 찾는 사람이 많다. 쇼팽 묘지는 파리를 여행하는 폴란드인의 필수 방문 코스다. 그들에게 쇼팽 묘지 참배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와 같다. 밴드 ‘도어즈’의 짐 모리슨 묘지도 쇼팽의 안식처에서 불과 몇 걸음이다.

 

▲ 바르샤바 쇼팽 공항 (사진출처=위키피디아/뉴스1)   


베토벤 탄생 250주년인 올해는 쇼팽 탄생 210년도 되는 해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축하 행사는 모조리 취소되었다. 바르샤바 국제공항의 이름은 ‘바르샤바 쇼팽 공항’이다. 쇼팽 없는 폴란드를 상상할 수 있을까.

 

 

 

<글·사진 제공 뉴스1=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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