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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푸시킨의 '마지막 레모네이드'
모든 장르 최고의 작품 쏟아냈던 푸시킨, 서른여덟에 요절
기사입력: 2020/05/21 [18:20]
윤구 기자/뉴스1 윤구 기자/뉴스1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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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시킨박물관의 푸시킨 서재 모습    



러시아에서 지명과 동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페테르부르크)는 '푸시킨의 도시'다. 곳곳에 푸시킨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심가의 지하철 역명도 '푸시킨스카야'다. 전편(前篇)에서 푸시킨이 반체제 아이콘의 시 '자유'로 인해 유배를 갔다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푸시킨이 보통의 정치범이었다면 그는 99.99% 시베리아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러나 푸시킨 집안은 명문가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감형을 위해 뛰어다녔고, 결국 황제 니콜라이 1세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유형지가 시베리아에서 키예프로 변경됐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키예프가 무슨 유배지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전제정치 사회에서는 황제가 있는 곳에서 멀면 멀수록 유형지 급수가 높아졌다. 1820년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로 보내졌다. 이후 그는 1826년까지 키슈노프, 오데사, 미하일롭스키를 자유롭게 떠돌았다.

 

▲ 문학카페 입구에 걸려있는 푸시킨 자화상   


◇권력의 변경에서 보낸 6년


이 6년의 유배가 푸시킨 문학을 심화시켰다. 페테르부르크라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그는 권력의 변경에서 보고 느꼈고 눈을 떴다. 특히 모스크바와 가까운 미하일롭스키에 머물면서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 반란에 관심을 갖게 된다.


농노해방과 인두세 폐지를 주장하며 푸가초프가 일으킨 무장 농민 봉기가 푸가초프 반란이다. 비록 2년 만에 진압됐지만 농노해방을 부르짖었다는 사실로 인해 푸가초프는 농노와 하층민들 사이에서 전설이 됐다. 푸시킨은 푸가초프라는 인물에 매료됐고, 그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나갔다. 십여년이 흐른 1836년에 탄생한 소설이 '대위의 딸'이다.

 

▲ 표트르 대제 기마상. 일명 ‘청동의 기사’   


◇페테르부르크에서 푸시킨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4곳


페테르부르크에는 푸시킨을 느끼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네 곳을 소개해본다. 첫 번째로 찾아갈 곳은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 동상이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황제 자리에 오른 예카테리나 대제(1729~1796)는 1782년 자신이 표트르 대제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이 동상을 헌정했다. 표트르 대제 동상은 네바강을 응시한다. 푸시킨이 이 동상에서 영감을 받아 1833년에 쓴 시가 '청동의 기사'다.


시인은 러시아인들이 개혁군주로 칭송해 마지않는 표트르 대제의 잔인한 면을 조명해 비판했다. 이후 이 동상은 '청동의 기사'로 불리며 러시아인의 정신에 자리 잡는다. 2차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페테르부르크는 독일군에 의해 900일간 봉쇄 공격을 받았다. 900일간의 저항 투쟁은 여러 가지 감동적인 실화(實話)를 남겼다.


그중 하나가 '청동의 기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시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리면서도 이 동상을 지키려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나무틀을 9m 높이로 세우고 그 안을 모래주머니로 채웠다. '청동의 기사'는 거대한 모래주머니 방공호 속에서 900일을 버텨낸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들은 '청동의 기사'를 찾아오는 게 오래된 전통이다. 청동의 기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1837년 1월 27일 오전 푸시킨이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앉았던 자리


페테르부르크에서 서울의 광화문통이나 종로통과 같은 거리가 네프스키 대로다. 이 거리에는 1815년 문을 연 유서 깊은 문학 카페가 있다. 러시아의 문인들과 명사들이 애정하는 카페로 자리 잡았다.


1837년 1월 27일 오전, 푸시킨은 하인과 함께 자택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문학 카페로 나갔다.
푸시킨은 2층 창가의 단골 테이블에 앉아 비서를 기다리며 레모네이드 한 잔을 주문했다.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창문 아래로 얼어붙은 모이카 강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비서가 카페로 들어오자 두 사람은 대기한 썰매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시인은 이성을 잃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눈을 가렸다. 내가 이놈을! 감히 내 아내를 모욕하다니. 상대는 기병 장교 단테스였다.

 

▲ 푸시킨이 문학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마신 레모네이드   


◇명예 결투의 현장


사연은 이렇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시인의 불행은 아내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데서 비롯됐다. 아내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급기야는 집에 익명의 편지가 배달됐다. 편지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곤차로바가 기병 장교 단테스와 밀회를 즐긴다'.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를 미리 안 지인이 중재해 결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일단락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단테스가 곤차로바의 언니와 결혼하면서 일은 더 복잡하게 얽힌다. 단테스가 더 무례하고 노골적으로 곤차로바에게 치근덕거렸다. 단테스는 푸시킨이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푸시킨은 아내를 모욕하는 단테스를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결투가 이뤄졌다.


당시 유럽 사회에는 개인 간에 명예 결투의 전통이 뿌리 깊었다. 권총이 보급되면서 명예 결투가 심심찮게 벌어졌다. 운문소설 '에프게니 오네긴'에서도 명예결투 장면이 나온다. 결투 장소는 시 외곽의 들판. 지금은 지하철과 도보로 3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체르나야 레츠카' 역에 내리면 승강장 한쪽에 어떤 남자의 동상이 기다리고 있다. 푸시킨이다. 이 지하철역 부근에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는 뜻이다.


결투 장소까지는 도보로 20여 분이 걸린다. 공원 이름은 '결투 공원'. 오벨리스크 같은 뾰쪽한 탑이 서 있고, 중간쯤에 푸시킨의 얼굴 부조가 박혀 있다. 탑 기단부에는 시인의 생몰연대가 날짜까지 기록돼 있다. '결투 공원'은 페테르부르크를 처음 찾는 세계의 문인과 지식인들의 필수 코스다.


 단테스는 장교였고, 푸시킨은 시인이었다. 푸시킨은 권총을 빼는 데 민첩하지 못했다. 푸시킨은 복부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눈밭이 붉게 물들었다. 푸시킨은 피를 흘리며 하인이 모는 썰매마차를 타고 한 시간 만에 자택에 도착했다.


주치의가 달려왔지만 총상이 너무 깊었다. 시인이 총상을 입고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집 앞 골목길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그의 회복을 기도했다. 주치의는 매 시각마다 정문에 푸시킨의 용태를 게시했다. 그러나 시인은 1월 29일 눈을 감는다.

 

▲ 결투 공원의 푸시킨 기념비    


◇러시아 전체를 충격에 빠트린 푸시킨의 갑작스러운 사망

 

푸시킨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러시아 전체를 충격에 빠트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와 같은 대도시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해 한동안 검은 상복을 입고 다녔다. 장례식이 끝나고 단테스는 사병으로 강등되고 러시아에서 추방됐다.


푸시킨이 눈을 감은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된다. 봄, 여름, 가을 이 박물관에는 관람객들로 넘쳐난다. 19세기 러시아 상류층이면서 위대한 작가의 공간을 엿보고 느끼는 기쁨은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가 없다.
1층에는 시인이 그날 사용한 권총 한 자루도 전시돼 있다. 푸시킨의 결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관람객들의 발길을 오래 붙든다.


푸시킨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서재다. 크기는 약 10평 정도. 고품격 도서관 같다. 책상 위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 중의 하나는 잉크대의 흑인소년 인형이다. 푸시킨이 결투 전날까지 쓰던 작품은 '표트르 대제의 흑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외증조 할아버지 이야기다. 동시대 작가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은 푸시킨을 추도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했다. '러시아는 푸시킨의 천재성이 삶의 시련과 깊은 사색의 단계를 거치면서 성숙해 비로소 최고의 힘을 발휘하게 된 바로 그때 그를 잃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또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이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에, 푸시킨은 서른여덟에 각각 눈을 감았다. 모차르트 연구가들은 모차르트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후대의 음악가들은 쓸 곡이 없어졌을 거라고 말한다. 푸시킨은 문학의 모차르트였다.

시, 소설, 운문소설, 운문희곡 등 장르 구분 없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작품을 쏟아냈다. 푸시킨을 러시아문학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러시아의 괴테이며, 러시아의 호메로스가 푸시킨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만나려면 먼저 푸시킨이라는 준령(峻嶺)을 넘어야 한다.
차이콥스키, 글린카 같은 작곡가들은 푸시킨 작품에 영감을 받아 오페라 곡을 써냈다. 푸시킨 묘지는 미하일롭스키에 있다.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푸시킨이 살아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리라'

 

 

<글·사진 제공 뉴스1=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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