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해설 > 칼 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여론/해설
칼 럼
<권우상 금요단상> 기업 경영에도 활용되는 손자병법
기사입력: 2020/03/26 [12:58]
권우상 명리학자·역사소설가 권우상 명리학자·역사소설가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 명리학자·역사소설가 

예로부터 전쟁을 잘하는 장수는 이기기 쉬운 상황에서 이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명성이나 용감하다는 공적도 없다. 즉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미 패퇴일로에 있는 적을 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장수는 패하지 않을 위치에서 적의 패배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에 싸우고,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움을 걸어 놓고 뒤에 승리하려고 한다. 이런 전략을 실천하여 승리한 사례를 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케다(武田)성(城) 공격은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깃발 아래 천하통일을 시도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숙명적인 적은 가이(甲斐)의 맹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을 두려워했는데 정치, 외교, 군사 면에서 깊은 속을 알 수 없었던 다케다 신겐에게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바다와 같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에이로구(永祿) 8년(1565년), 오다 노부가나는 조카 딸을 양녀로 삼아 다케다 신겐의 대(代)를 승계할 아들 가츠요리(勝懶)에게 시집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고, 2년 후 가츠요리가 사망하자 적자 노부타다(信忠)을 다케다 신겐의 다섯 살 된 막내딸 마츠히메(松姬)와 혼약을 맺어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이렇게 되자 두 세력 간에 맺는 동맹은 한발 먼저 교토(京都)에 입성하여 기나이(畿內), 야마시로(山城), 야마토(大和) 카와치(河內), 이즈마(和泉). 세츠츠(攝津) 등 여러지역을 지배하게 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다케다 신겐의 반감으로 위기에 놓였다. 그리고 미카타가하리(三方加原) 전투에서 패하여 오다 도쿠가와와 와대 다케다의 혈투 끝에 결국 다케가 신겐은 죽음을 맞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덴쇼우(天正) 3년(1575년)에 나가시노(長藻) 전투에서 가츠요리가 이끄는 당시 최강의 다케다의 기마군단을 철포로 완전히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장수와 병사들을 대부분 잃은 다케다 가(家)는 완전히 몰락했다. 손자병법에서는 적은 군사를 다스리듯이 많은 군사를 다스리는 것이 바로 부대 편성이며, 적은 군사가 전투하듯이 많은 군사를 전투하게 하는 것은 명령의 문제라고 했다. 병법에서는 삼군(三軍)의 대군이 적군을 만나 패하지 않게 하는 것이 기법(奇法)과 정법(正法)이다. 아군의 병력으로 적군에게 공격을 가할 때, 마치 돌로 알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공격은 실(實)로써 허(虛)를 찔러야 한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압박에 저항하기 힘들었던 동로마 황제 요한 네스 6세는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티무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티무르는 몽골 대제국의 하나인 차카타이 한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왕가가 쇠퇴하면서 독립하여 스스로 칭기즈칸의 후예임을 칭하고, 세력을 확장해 중앙아시아 일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계속 이슬람 세력을 구축하려던 티무르에게 동로마 황제의 구원 요청은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와 같은 것이었다. 1404년 7월 20일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티무르군과 바예지드군은 소아시아 서쪽 카라 평원에서 대치하였다. 전력은 서진(西進)하여 양카라를 먼저 점령한 티무르군이 유리했다. 티무르군은 몽골 기마궁병(騎馬弓兵)으로 편성되었고 7개의 군단은 티무르의 용맹한 아들이 통솔하고 노련한 장수들이 보좌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바예지드군은 예니체리 군단이라 불리는 소수의 친위군 외에 여러 번주(藩主)들의 병사와 몽골과 서유럽에서 차출된 용병군이 섞여 있는 불안전한 부대편성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바예지드군은 오스만 제국군의 철통같은 규율 아래서 싸우는 티무르군 기마궁병의 강력한 기동력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전투가 격렬해지자 몽골과 서유럽인 용병은 달아났다. 그리고 평소 바예지드의 가혹한 통치에 반감을 품었던 병사와 번주들도 모두 전장을 이탈하여 도망쳤다. 바예지드의 큰아들 쉴이만 역시 처첩과 금괴 등 재산을 챙겨 도망쳤다. 결국 바예지드는 참패하여 티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티무르와 바예지드 두 영웅의 대결은 티무르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러한 교훈은 각 기업의 목적 및 목표, 경영 환경 등에 맞게 조직을 확립하는 것을 비롯한 현대의 기업 경영에도 활용할 수 있다.

권우상 명리학자·역사소설가 권우상 명리학자·역사소설가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경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