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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2題] 헤르만 헤세·괴테
헤르만 헤세 '데미안' 100년, 그리고 BTS와 차명석
기사입력: 2019/10/29 [17:48]
유용식 기자 유용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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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세계문학 코너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세계문학 서가의 주소는 J16~J17이다. 이곳에 가면 세계문학 베스트셀러들이 진열 중이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세계문학의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세계문학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들어가는 작품들은 변동이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시즌인 시월이 되면 변화가 종종 생긴다. 세계문학 코너에 노벨문학상 작가의 대표작이 신성(新星)처럼 반짝 등장하기도 한다.


세계문학 서가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은 눈에 가장 잘 띄는 위치에 놓인다.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984', '인간 실격' 등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민음사)은 마치 고향집 동구 밖의 500년 넘은 은행나무처럼 그 자리에 묵묵히 버티고 있다. '데미안'을 집어 맨 뒷장의 판권을 살펴본다. 헉! 2판 106쇄다.

 

▲ 고서점 점원 시절의 헤르만 헤세   

 

▲손가락질받던 문제아 헤르만 헤세

 

젊은 시절을 순탄하게 지낸 사람이 방황하고 아파하는 청춘을 위로할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목사인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학교 분위기가 맞지 않아 괴로워한다. 신학 공부가 끔찍이 싫었던 열다섯 소년은 마침내 신학교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아버지를 실망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소년은 자살을 기도한다. 아들을 잃을뻔한 아버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 헤르만 헤세의 고향 칼브   


소년은 다시 인문고등학교에 들어가지만 여기서도 적응을 못 한다. 또다시 학교를 중퇴했다. 두 번의 학교 중퇴와 자살 기도. 손바닥만 한 고향 칼브에서 헤세는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는 문제아였다.


고향에서 탑시계공장 견습공으로 일하던 그는 막연하지만 작가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는 대학도시 튀빙겐으로 간다. 시계 부속품만 만지작거려서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1895년 튀빙겐대학 앞의 고서점에 점원으로 취직한 그는 책 속에 파묻혀 닥치는 대로 읽고 쓰며 대학생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를 특히 사로잡은 작가는 괴테였다. 괴테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었다. 4년을 튀빙겐에서 보낸 뒤 그는 다시 스위스 바젤로 가서 이번에도 고서점에 들어간다. 바젤의 고서점에서도 역시 4년을 보낸다.


고서점을 그만두고 그는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구상해온 소설을 썼다.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테 카멘친트'가 출간됐다. 첫 작품은 비평과 판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06년 두 번째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발표했다.

 

▲ 튀빙겐의 구시가. 가운데 자주색 건물이 헤세가 일한 고서점 '헤켄하우어'다.   


청춘의 방황을 다룬 이 소설 역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11년 헤세는 인도여행을 다녀온다. 인도여행 후 그는 평화주의자가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스위스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칼럼을 신문에 싣는다. 독일 언론이 일제히 그를 비난했고, 그의 모든 작품이 독일에서 판매와 출판이 금지된다.

 

악몽 같은 전쟁이 끝났다. 1919년 그는 본명을 숨기고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베를린의 출판사에 장편소설 원고를 넘긴다.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을 숨긴 채 작품성만으로 독자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신인작가 에밀 싱클레어의 '데미안'은 나오자마자 문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신문에 '데미안' 서평을 기고하기도 했다.
에밀 싱클레어는 마침내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 상의 수상자로 선정된다.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자 헤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데미안의 실제 저자가 자신임을 밝히고 수상을 거부한다.

 

▲ 1919년 베를린에서 출판된 에밀 싱클레어 저자의 ‘데미안’    

 

▲강은교와 이석훈이 말하는 '데미안'

 

올해는 '데미안'이 세상 빛을 본 지 100년이다. 1차대전 후 세계의 젊은이들이 데미안에 휩쓸려 내려간 것처럼 우리는 모두 데미안을 읽으며 청춘의 바다를 헤엄쳐 건넜다. 지금도 또 다른 젊은 세대가 데미안을 타고 건너는 중이다.


데미안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 소설이다. 헤세를 아는 독자들이라면 에밀 싱클레어가 사실은 헤르만 헤세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 '데미안'의 유명한 첫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싱클레어는 크로머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다 상급생인 데미안을 만나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데미안을 도저히 잊지 못하는 것은 다음 구절 때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한 출판사는 데미안 출간 100주년이라는 점에 착안해 '내 삶에 스며든 헤세'(라운더바우트)라는 책을 기획해 출판했다. 시인 강은교 역시 고등학교 시절 데미안과 만났다. 강은교는 이 책에 실은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아직도 헤세 시절의 아브락사스는 오지 않고 있다. 나 자신에 이르는 길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그리고 세상은 아직도 거대한 벽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벽'은 흰 옥양목 커튼이 순결한 햇빛을 투과시키는 창이 있는 눈부신 벽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도 걸을 수 있다. 아브락사스를 찾아서"


한국인의 '데미안' 사랑은 각별하다. 프로야구 LG트윈스 차명석 단장은 공부하는 야구인으로 유명하다. 투수 출신인 차명석 단장은 매년 책 100권을 읽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수년째 실천해오고 있다. 해설위원 시절 그는 중계방송 중에 "선수가 성장해 나가려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알을 깨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데미안'을 언급했다.


BTS 역시 '피, 땀, 눈물'을 발표하면서 '데미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SG워너비 출신의 가수 이석훈도 최근 '데미안'을 언급했다. 그는 대학생 음악 경연대회 '보컬 플레이' 심사평을 하던 중 "실용음악과 출신들은 실용음악과라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미안'은 나만의 내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데미안'은 이렇게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숙이 우리의 문화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 바이마르의 괴테 국립박물관   

 

◇괴테 부모의 특별한 가정 교육…말년에 왜 아랍어 배웠나


강연에서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당신의 어린 자녀가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다 해체해놓아 집안이 엉망이 됐다. 이 광경을 보고 당신은 뭐라 하겠나?"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한다. "욕을 퍼붓지요", "이게 얼마 짜린데 하고 호통을 칩니다", "귀싸대기를 때립니다"
그러면 청중들이 "와~"하고 웃는다. 그렇다. 보통의 부모들은 대개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18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상류층 가정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교양인이었던 부모는 그 아이를 덮어놓고 혼내지 않았다.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물었다.
아이가 말했다. "피아노 소리가 어떻게 해서 나는지 궁금해서 피아노를 뜯어봤어요".

부모는 "우리도 피아노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가 궁금했었다"며 맞장구를 친다.


부모는 아이와 함께 피아노 부품들을 살펴가며 아이의 호기심에 편승해 소리가 나는 원리를 탐구한다. 혼날 줄만 알았던 아이의 상상력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를 상상해보라. 이 가정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이 아이가 훗날 독일의 대문호가 되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다. 괴테는 독일인의 정신이다. 괴테를 모르고서는 독일인과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서울 남산의 독일문화원의 이름을 왜 '괴테 인스티투트'라고 지었겠는가.

 

▲ 괴테 집필실 옆 작은 침실   

 

▲노년에도 시들지 않은 호기심

 

생몰연대에서 알 수 있듯 괴테는 83년의 생애를 살았다. 평균 수명이 50세에 머물던 19세기의 83세면 지금 기준으로 치면 100세에 육박하는 나이다. 말 그대로, 괴테는 천수(天壽)를 누렸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말년이다. 이 세상 모든 노인의 소망은 단 한 가지로 수렴된다. '아프지 않고 눈을 감고 싶다' 괴테가 그랬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프지 않았고 펜을 놓지 않았다.

죽기 1년 전인 1831년 그는 대작 '파우스트 2부'와 '괴테 자서전-나의 인생, 시와 진실'을 완성했다. 이렇게 괴테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60대 이후에 쓰였다.


1832년 3월 22일 오후, 괴테는 바이마르 저택의 집필실 책상에서 글을 쓰다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지팡이를 집고 집필실과 붙어 있는 작은 침실로 갔다. 그리고 침대 옆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괴테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절대 침대에 눕지 않았다. 침대에 눕기 시작하면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괴테가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더블유(W) 써보였다. 그 광경을 비서가 지켜보았다. 잠시 후 괴테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잠시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는 영면(永眠)에 들었다.


괴테의 생애는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충만한 인생이었다. 황실 고문이었던 아버지는 끝없이 어린 아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어를 가르쳤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했다. 7년전쟁으로 프랑크푸르트가 프랑스군의 점령을 받을 때 괴테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어를 배웠다. 새롭고 앞선 것을 배우는 데 가족 모두가 열성적이었다.

 

▲ 괴테하우스에 자리한 조각상들   


어린이들은 누구나 호기심이 넘친다. 무엇을 보든지 어디에서든지 궁금한 것 투성이다. "왜 그래요?"라며 귀찮을 정도로 묻고 또 묻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호기심이 촛불처럼 사그라든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호기심에 대한 호응이 없으면 더 이상 묻지 않게 된다. 괴테는 젊은 시절에는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여체를 끝없이 탐구했고, 부인과 사별하고 난 뒤인 70세에도 10대 소녀를 사랑해 청혼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맛에 대한 호기심으로 광활한 미식(美食)의 세계에 탐닉했다. 그러나 평생을 걸쳐 변하지 않은 것은 지적 호기심이었다. 바이마르 들판에서 우연히 주은 광석에 호기심을 느껴 광물학과 지질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괴테국립박물관으로 운영되는 바이마르 저택에 가면 괴테가 수집한 광석만을 전시하고 있는 방이 따로 있다.


만년에 괴테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동방'이었다. 운문으로 된 중국 소설을 처음 영어판으로 접하고 그는 흥분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시 독일어로 중역(重譯)된 중국 소설을 읽고는 중국문화에 빠져버렸다. 이런 소설의 세계도 있을 수 있구나! 그의 호기심은 중국에만 머물지 않았다. 페르시아 여행을 상상하며 아랍세계에 대한 관심을 넓혀나갔다.


만년에 아랍어를 배웠다는 사실이 문호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비서와 지인들은 괴테의 이런 코스모폴리탄적 관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을 늙어 보이게 하는 것은 주름살과 머리칼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신을 늙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호기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은 늙어도 늙은 게 아니다.

 

 

▲ 조성관 작가   

<글·사진 제공 뉴스1=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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