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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한글①] '반대를 위한 반대' 한글 탄생 가로막다
기사입력: 2019/10/01 [18:30]
구정욱 기자 구정욱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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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대, 일제 강점기 등 무수한 한글 말살 정책
국가 인정한 국문이 된 것은 창제된 지 무려 448년만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해 반포한 문자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기까지 많은 위기가 있었다. 양반의 반대, 일제 강점기 등 무수한 한글 말살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다가오는 573돌 한글날(10월 9일)을 맞아 창제 시기부터 현재까지 한글의 위기를 살펴보고 세계 속으로 뻗어가는 한글의 위상을 조명하는 기획연재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으며, 자음 17자와 모음 11자 등 총 28자로 구성된 독창적인 글자 체계다. 세종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함을 한탄해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했지만 이 과정을 매우 은밀하게 추진했다.


한글 창제가 기득권 계층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현전 학자를 중심으로 성리학자들은 한글 창제와 보급과정에서 크게 반발했다.


이에 세종은 세자(뒤의 문종)와 수양대군(세조) 그리고 집현전 하급관리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으며 세조는 선왕의 유지를 이어 한글 보급에 힘썼다.

 

▲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뉴스1 제공)

 

◇천지인과 발음기관 모양 본뜬 표음문자 ‘한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세종대왕임이 학계의 정설이다. 한글은 글자 모양 28가지를 발음기관과 하늘, 땅, 사람 등 삼재에서 본떴다. 표음문자인 한글은 알파벳 등의 일반적 표음문자와 다르게 자음과 모음을 합쳐 음절 단위로 표기하도록 설계됐다.


한글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을 만든 목적과 근본 뜻, 창제원리, 역사적 의미를 비롯해 새 문자의 다양한 예들이 실려 있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익혀서 읽고 쓰기 위해 제작됐다. 이에 한글은 사람의 말소리뿐만 아니라 온갖 자연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적을 수 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배우기 쉽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할 때 목구멍과 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세 가지의 기본 형태를 조합했다. 가운뎃 점 '·'(아)는 하늘을 뜻하고 'ㅡ'(으)는 모양처럼 평평한 땅을 가리키고 'ㅣ'(이)는 사람을 나타낸다. 즉 천지인 3재가 모음자에 스며있는 것이다.


한글은 동아시아에서 기존에 사용된 문자의 장단점을 수용했다. 학계는 한글의 창제 배경에 대해 15세기 한자문화권의 핵심사상인 성리학에 바탕해 한자문화의 수용하기 위해 창안됐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  훈민정음 복각 해례본·언해본 (뉴스1 제공)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


한글은 창제 때부터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 세력은 한글 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학자들이 다수였다. 대표적 인물은 집현전 부제학(전임교수급) 최만리였다.


그는 훈민정음을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라고 비판했다.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훈민정음을 새로 만드는 것이 중국을 섬기고 중화의 제도를 따르는 것을 거스른다고 주장하면서 몽고·서하·여진·일본·서번 등 중국 글자가 아닌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는 모두 오랑캐 민족임을 강조했다.

 

상소문에는 훈민정음이 자칫 중대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실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어떡하겠느냐"고 걱정했다. 집현전 학자 정창손은 백성이 문자를 깨우치는 것 자체가 무용하다며 세종에게 직접 반박했다.


세종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면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하자 정찬손은 "삼강행실을 이미 반포했지만 충신과 효자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의 문제이지 (문자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들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점이었다. 최만리는 "27자의 언문(한글)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고심노사해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느냐"고 우려했다.

 

◇훈민정음 지킴이 역할 자처한 세조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훈민정음과 관련한 주요한 임무를 담당하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는 대군 시절에 한글 최초의 산문집 '석보상절'을 썼다. 이 책은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의 일대기를 담았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석보상절'과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월인석보'를 1459년에 펴냈다.


특히 월인석보 첫머리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담아 민중들이 쉽게 훈민정음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즉위 6년째인 1460년에 관리의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포함하도록 명했고, 성균관 과목에도 훈민정음을 넣도록 해 훈민정음을 읽고 쓰는 사람을 양성했다. 그는 1461년 집현전을 없애고 간경도감을 설치했다.

 

간경도감은 훈민정음으로 불경과 같은 경전을 주로 편찬했다. 이때 지은 불경 언해본들은 오늘날 한글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그는 1461년 최항, 한계희 등 30여 명에게 누에고치 등 양잠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농서인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명해 일반 농민들이 양잠 생산에 관한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  주시경 육필원고 ‘국어문법’ (뉴스1 제공)    

 

◇한글, 고종황제가 드높이고 주시경이 지켜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오랫동안 '언문'(상말을 적는 문자)을 비롯해 언서,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로 불리며 천대받았다. 이런 한글이 (국가가 인정한) 국문이 된 것은 창제된 지 448년 만이다.


고종황제는 1894년 한글을 국가 공식 문자로 격상했다. 그는 '법률과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혼동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홍범 14조는 이 칙령을 바탕으로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 순으로 제정·선포됐다.


한글은 448년 만에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문자로 자리매김하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일제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강탈하자 한글은 국어의 지위를 하루아침에 빼앗겼다. 일제는 학교 국어시간에 일본문자와 일본어를 가르쳤으며 우리말글을 이와 구별해 '조선어'라고 불렀다. 이마저도 1938년부터 조선어의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


주시경 선생은 이런 상황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 했다. 그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 초기 일본어가 국어로 둔갑하는 때에 한글 연구에 힘써 우리 국어를 지키는 데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했다.

 

◇고종황제 ‘한글’ 국가 공식 문자로 격상하다


고종황제는 창제 이후 448년 동안 한자에 밀려 있었던 한글의 위상을 격상했다. 한글은 15세기에 창제됐지만 공식 문자의 역할을 한자(한문)에게 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종은 즉위 31년인 1894년 12월 17일(음력 11월 21일) 한글을 국가 공식 문자로 지정하는 칙령을 내각에 지시했다.


한글은 이 칙령을 통해 비로소 공식 문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칙령 발표 20일 뒤인 1895년 1월 7일(음력 1894년 12월 12일)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을 한글·한문·국한 혼용문 순으로 작성해 종묘에 고한 뒤에 제정·선포했다. 1894년은 국내·외 정세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민중의 저항과 청일전쟁과 같은 국제 정세, 갑오경장 같은 일본 중심의 개혁 등이 쉼 없이 몰아쳤다. 학계에서는 고종의 칙령을 당시 정세와 관련해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한글이 자주부강의 염원이 담아 공식 문자로 확립됐다는 것이 지배적 의견이다.


대한제국은 이런 격동기 속에서도 칙령 발표 이후부터 관보를 국한문 혼용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1895년 국한문 혼용으로 발표했고 이듬해인 1896년에는 한글로 제작한 '독립신문'이 발간되기에 이른다.

 

▲  일본어 강제 교육사진 (뉴스1 제공)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최대 위기 맞은 한글


일제는 조선(대한제국)을 침탈한 초기에 조선어와 조선어 표기를 위한 정비 사업을 하는 등 구한말에 했던 문자 정책을 겉으로 이어갔지만 후반기에 오면서 한글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정책을 펼친다. 일본어가 이 땅에서 주류로 떠오르는 것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전부터다.


친일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인 1906년 대한제국 통감부가 초등학교용 일어독본과 이과 과목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편찬하면서부터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6월 6일자 사설에서 "한국 유년에게 일문 교과서를 익히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뇌수를 뚫고 저 소위 일본 혼이라 하는 것을 주사하고자 함"이라고 일제의 저의를 꼬집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에 의거해 한글을 공식 문자가 아닌 생활문자로 끌어내렸다. 이 법령은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주고, 특히 국민 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일제가 교육령의 '1국1국어의 원칙'을 악용하자 한글은 조선어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또한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도 일본어로 작성됐다. 일제는 황민화 정책의 하나로 1938년 3월 15일부터 조선어 병용에서 일본어 상용, 즉 '고쿠고조요'(國語常用)로 바꿨다.


조선어는 이 정책으로 정규 교과목에서 사라지고 우리 민족은 식민지배 하에서 일본문자와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해야 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을 내건 침략전쟁이 동아시아로 전선을 넓히자 국어전해(全解)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1940년 우리 글 신문을 폐간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폭력적인 언어 탄압이 가해졌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통해 한글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위상을 잃은 것으로 모자라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한글은 이런 상황에서 주시경 선생을 비롯해 한글학자들의 헌신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  개화기 국어학자 주시경(1876~1914) (뉴스1 제공)   

 

◇주시경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른다”


주시경 선생은 언문이라 천시받던 훈민정음에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붙였다. 그는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제작과 한글 교육,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국어 연구에도 힘썼다. 한마디로 그는 국어의 규범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글을 정립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1896년 창간하면서 주시경을 독립신문의 교보원(校補員, 오늘의 편집 기자 겸 교열 기자)으로 채용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면서 국문 표기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신문사 안에서 국문 동식회(國文同式會, 최초의 국어연구회)를 만들고 국어 문법과 한글 표기법 연구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한글 전용, 한글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도 실천했다.


서재필이 러시아의 불합리한 절영도 통치 요구를 규탄하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추방되자 주시경도 신문사를 퇴사한다. 이후 주시경은 '제국신문'에서 기재(記載, 일종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인 스크랜턴(W. B. Scranton)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수십 개의 학교를 오가며 국어 교사로서 강단에 섰다.


뿐만 아니라 주시경은 '국문 연구소'에서 진행한 국문 표기법 정비 작업에 위원으로 참여해 그 연구 결과물로 1909년 12월 '국문연구의정안'을 제출했다. '국문연구의정안'은 바로 공포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시경은 국어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연구'(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을 저술해 표의주의 철자법 확립, 한자어의 순화, 한글 풀어쓰기 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주시경은 '국어 강습소', '조선어 강습원' 등을 개설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는 헌신적으로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그의 제자들이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해 우리말 사랑의 명맥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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