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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강제징용…"폭격에 불구 되서야 지옥은 끝났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 故 임일택 씨 안타까운 사연
기사입력: 2019/04/09 [18:12]
구정욱 기자 구정욱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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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에 강제 징용된 후 열악한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입수해 지난달 12일 공개했다. 사진은 벌거벗은 채 미군에 구조된 한국인 징용자들의 앙상하게 마른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뉴스1)  

 

 강제징용 총 피해자 수 최소 107만5553명
생존자 지난 2017년 6570명…1만 명 선 붕괴


일제 강점기 당시 경남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피해를 당했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처참한 실태가 故 임일택 씨 유족 등에 의해 지상에 고발됐다.


1942년 함경북도 백무산, 1943년 함경남도 길주군, 1944년 일본 나고야. 결혼한 지 한 달만에 함경북도 철도 건설 현장으로 끌려갔고 도망쳐 나왔으나 다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3년에 걸쳐 일본 나고야까지 끌려간 20대 청년은 결국 허벅지에 포탄 파편이 깊이 박히고서야 지긋지긋한 강제노서 해방됐다.


부상으로 일을 할 수 없어서 버려지다시피 고국으로 돌아온 청년. 평생을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며 팍팍한 삶을 살아야했다.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집단소송 참여자 모집 마무리…故 임일택 씨 사연 눈길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집단소송 참여자 모집이 마무리된 가운데 3차례 강제 징용당한 피해자 故 임일택 씨(1922~2007년)의 사연이 눈길을 끈다.


지난 6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따르면 임 씨는 1942년 2월과 43년 3월, 44년 11월 등 3차례 일제에 강제징용됐다.


1942년 1월 30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 작은 마을에서 살던 임 씨는 마을 한 여성과 혼인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 스물한 살. 새롭게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던 임 씨는 며칠 지나지 않아 면사무소 관계자들에 의해 구례읍 대창여관으로 끌려갔다. 끌려온 이들은 임 씨를 포함한 마을 청년 4명. 이들은 찬수역(구례 구역)으로 이동해 열차 화물칸에 탑승, 함경북도 연사읍 북쪽 백무산 근처에 도착했다.


백두산과 두만강이 보이던 곳으로 백무산에서 임 씨는 철도 터널 뚫는 일에 동원됐다. 고된 일을 하면서도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임 씨는 4~5개월만에 도망쳐 우여곡절 끝에 구례 집에 도착했다.


임 씨는 생전 증언을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굴 뚫고 남포(다이너마이트)도 튀기고 로꾸부도 했지. 십장이 있고 그 사람이 양식을 타다가 맨 콩깻묵에 안남미, 서숙(조) 묵고 살아야 되는데 모두 저녁이면 다리 아파 죽겠다고 야단이야. 일은 되고 배가 고파서 도망쳤지" 임 씨가 집에 돌아왔단 소식을 접한 면사무소 관계자는 1943년 3월 임 씨를 또다시 역사로 끌고 갔다.


이번에는 함경남도 길주군 덕산면으로 끌려가 철도 공사에 투입됐다. 흙과 자갈을 나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는 일반 노임보다 훨씬 적었다. 공사 일이 힘들어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맞아 뼈가 부러지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객지 나가면 하루에 이틀 밥값은 줘야 하는데 하루 밥값 40원인데 60원을 주더라구. 우리는 알선인부라서 돈 조금 주고 시킨 거라 도망치다 잡히면 맞아 죽어. 뼈가 부러져도 말 못해. 일본 관청과 하는 일이라 두들겨 맞아 죽어도 소용없어" 같은해 11월 겨울 날씨로 일을 진행하지 못하자 그제야 임 씨를 비롯한 인부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임 씨는 악몽같은 날이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944년 11월, 임 씨는 일본군에 의해 또다시 끌려갔다.


임 씨는 전남 여수에 도착했다. 전남 곳곳에서 임 씨처럼 끌려온 이들이 모였다. 3일간 대기하면서 일본군은 징용자들을 목욕시키고 옷을 쪄서 입혔다. 병균이 옮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임 씨 등 징용자들을 태운 배는 대마도를 거쳐 사흘 만에 일본에 도착했다. 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미군 잠수함을 피하려다 보니 사흘이나 걸렸다.

 

▲ 일본 강제 징용 당시 미국 포격 파편으로 흉터로 남은 故 임일택 씨의 허벅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뉴스1)    

 

◇일본 도착후 대기하다 10만4천여 명 강제 징용자 미군기 폭격 당해


일본에 도착한 임 씨는 나고야의 비행기 만드는 공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했다. 그곳에 도착해 임 씨가 받은 군속번호는 '104287번'. 10만4287번째 인부라는 의미였다. 임 씨는 이름이 아닌 군속번호 104287번으로 불렸다.


"나고야에서 우리가 비행기 만들 차례인데 일을 못 했어. 10만4천 명이면 작은 인원이 아니잖아. 사람들을 처리도 못하고 잔뜩 모아놓고 훈련소에서 훈련받는다더니 훈련자원소가 없어서 들어가지도 못했어" 그러다 미군 폭격이 시작됐다.


폭격으로 임 씨는 허벅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B-29가 전에는 바로바로 지나가더니 뜬금없이 시커먼 물동이 같은 게 내려와. 처음엔 저것이 무어냐 보니까 여기서 쿵, 저기서 쿵 천둥소리가 나. 겁이 나 갈대밭으로 가려고 하는데 다리에 피가 난장이고 걸을 수가 없어. 다행히 공습이 해제돼 안 다친 사람하고 함께 식당에 가보니까 식당이 날아가버리고 없어" 폭격을 맞아 사라진 식당 앞에는 죽은 사람, 다친 사람 모두 일렬로 누워있었다.


"창자가 나온 사람, 머리 터진 사람, 피가 난장이고 창자가 불금불금, 피가 불금불금, 나도 누워있는데 간호부가 붕대와 가위, 빨간약으로 우선 감아가지고 화물차에다 눕혔지" 응급처치를 받은 임 씨는 미쓰비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는 살이 썩어들어가고 핏줄이 튀어나온 임 씨의 허벅지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네 명이 임 씨를 붙잡고 마취 없이 진행했다. 수술을 받다 정신을 잃은 임 씨는 이틀 뒤 나고야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임 씨는 불구자로 낙인찍혀 귀국

 

이후 4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임 씨는 신체검사를 받고 일을 하지 못하는 '불구자'로 낙인찍혀 귀국 명단에 포함됐다. 같은 해 4월 일본군은 부상으로 필요 없는 수용자들을 모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순으로 귀국시켰다.


스물한 살 때부터 끌려가 3차례의 강제 집용을 마치고 부상을 입어 집으로 돌아온 임 씨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임 씨는 다리 부상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해 2년간 일도 못 하고 집에만 있었다.


"집에 왔더니 미쓰비시가 광의면에 내가 중상을 당해 사망했다고 전화했다고 하더라고. 집에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고. 내가 죽었다고까지 한 건데. 목숨 유지한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알고 산 거지" 2005년 2월 임 씨 자녀들은 아버지의 강제 징용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서를 제출했다.


이후 증거 자료 수집을 위해 자녀들은 같은해 3월 1일 임 씨를 인터뷰하고 이를 녹음했다. 임 씨의 허벅지 흉터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당시 임 씨의 나이는 85세. 한뼘 크기의 흉터는 가늘어진 다리로 인해 작아졌다. 2년 뒤 2007년 7월3일 오후 7시 임 씨는 숨을 거뒀다.


같은해 12월 6일 임 씨 가족들은 진상규명위로부터 심의·결정통지서를 받았다. 이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로 심의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임 씨는 살아생전 조국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사실을 인정받고 떠나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먼저 세상을 떴다.

 

▲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부 관계자들이 지난 2017년 5월 일제 강제징용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일본 규슈지역을 방문했다. (금속노조 경남지부 제공/뉴스1)  

 

◇징용 피해자 빠르게 감소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노동자 강제 동원 또한 본격화했다. 조선의 경우 1939년 7월 조선총독부가 국민징용령을 공포한 후 그 피해가 커졌다. 초기에는 형식상 모집이던 강제동원은 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4년경 무렵부터 온전히 강제징용이 됐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에 따르면 강제징용 총 피해자 수는 최소 107만5553명이었다. 이들은 울산비행장, 경남 진해시 항공창, 부산항 등 한반도 곳곳에서 노동 착취를 당했고, 상당수는 일본으로, 사할린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를 당한 생존자들이 빠르게 줄고 있는 가운데, 지역별 여성 생존자 수는 지난해 까지 경남이 25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일제강점기 징용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실질적인 배상과 사죄 등을 받지 못 한 채 분노와 아픔을 겪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특별법(강제동원조사법)'에 따라 생존자에 한해 연간의료지원금 80만 원을 징용피해자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이 기준에 따라 징용피해 생존자는 1만 명 선이 무너진 지난 2015년 9937명, 2016년 875명, 2017년 6570명 등 해마다 1천 명 이상 감소했다.


시민모임 관계자는 "14살 어린 나이에 징용당한 피해자마저 90세에 이르렀다"라며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생존자들에 대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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